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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부대 그리고 기독교

Scott's manager 2019. 1. 2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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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들어서 <한국 문화사> 세미나에 참여하고 있다. 문화이론이야 탐독하던 서적들이 있어서 주워 들은 게 많지만, 특정 시대의 문화를 촘촘하게 들여다본 적은 별로 없다. 덕분에 나름의 기대가 있다. 그 동안 관심 갖지 못했던 영역을 다루는 경험 자체가 기분 좋은 자극제가 되기 때문이다.

 

세미나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시대는 식민지 근대(19세기 말~광복 전후). 2019년이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의 해인 걸 고려할 때, 시기적으로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특히 식민지 근대를 다루는 텍스트를 읽으면서,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치는 세력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어서 좋다. 지난 2주차 때는 <태극기 부대>, 즉 우경 세력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영향 가운데 형성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단초들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이는 우경화 된 기독교 세력들이 <태극기 부대>라는 정체성을 자신의 주체성으로 삼는 현상을 들여다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하여 관련 텍스트 중 일부를 가져와 기록해 둔다.

 

사실 주체의 형성이라는 게 <사회 구조>가 끼치는 영향과 함께 <개인적인 경험>들이 큰 작용을 하는데, 일단 여기서는 한데 묶어 설명하기 어려운 각 개인의 특수한 경험들은 논외로 하고 역사적·사회적 맥락들과 관련한 것들을 담기로 한다.



 

 

1. 몰역사적이고 주체성이 결여된 역사관 학습

 

실증주의 역사학은 당시까지의 민족주의 사학이나 사회경제사학의 전통과 거의 단절된 채 출발했는데, 학문으로서의 무사상·무성격을 나타내었을 뿐 아니라 몰역사적이고 주체성이 결여된 사회과학과의 불행한 관계, 즉 접합되지 않음으로 해서 동시대사 연구가 결여되어 자칫하면 복고주의적 역사인식으로 치우쳐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말한다면 반공독재 정치권력에 이용되는 측면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윤건차(2000). ‘동시대 한국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현대 한국의 사상 흐름>. 당대. pp.29-30.

 

베이비부머 세대들을 가만 보면, 역사에 대한 특정 사관을 갖는 걸 부담스러워 하고, 회색지대 같은 중립객관을 표하는 게 주된 사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객관이라는 개념은 합리적 사고방식을 드러내 주는 일면으로, 중립이라는 말은 어디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을 보여주는 일면으로 자의식을 불어 넣어 주었다. 실제로 나도 부모님으로부터 객관중립이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고, 그렇게 역사관을 주입 당했다.

 

 

2. 실상은 중립이 아닌 우경화

 

온 국민에게 분단의식이 내면화되어 현실기피 경향이 자리잡고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 언론활동, 연구활동, 기타 모든 활동이 체제 지향적으로 왜곡되기에 이르렀다. 공산주의에 대한 피해의식과 적대의식이 고착화되는 가운데 애국’, ‘민족주의’, ‘민주주의등과 같은 용어는 지배층을 이롭게 하는 형태로 전도되어 사용되었던 것이다.”윤건차(2000). p.34.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중립적 사관을 표방하는 이들의 성향이 그리 중립적이지 않다는 데에 있다. 위 내용처럼 민족을 이야기하고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말의 논리는 우경 지배 세력의 논리를 따른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기득권 세력이 <분단 상황>을 통제 도구로 악용하는 데에서 비롯하는 바도 크다. 확인할 수 없는 외부의 적, 조장된 공포, 내부 결속은 기득권의 체제 유지를 공고히 했다.

 

한국사회의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 뜬금없이 <분단 현실 극복>이 거론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때마다 울궈 먹는 분단의식에 기반한 색깔론의 해체는, 그 논리의 바탕을 이루는 분단 현실을 해결하는 가운데 상당 부분 해소되기 때문이다. 2018년 판문점 선언과 더불어 남--미의 관계가 크게 호전되자, 태극기 부대의 논리가 모순에 빠졌던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북한을 멀리하고 미국의 편을 들어야 하는데, 그 미국이 지금 북한과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3. 가늠하기 어려운 중간층

 

“876월 항쟁 이전에는... 중간층의 보수적·친지배층적 성격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즉 관료제도에 대한 의존, 출세주의, 물신주의, 물신주의, 보수주의에 물들어 있는 것을 중간층의 이데올로기적 속성이라고 보면서 비판했다(박형준,1989). 그러나 6월항쟁에서 이루어낸 중간층의 적극적인 역할은 중간층이 지닌 상대적 진보성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면서, 민주화과정에서 중간층의 역할을 강조하는 견해가 확산되어 간다.” 윤건차(2000). p.72.

 

중간층에 대한 논의는 참 어렵다. 지주와 소작농 혹은 자본가와 노동자처럼 이항대립으로 양분할 수 없는 주체들이 사회에 출현했는데, 이들의 성향을 무 자르듯이 깔끔하게 풀어내기가 여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중간층은 위 내용처럼 사회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부분도 있지만, 반대로 사회 변혁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다. 군부 독재 정권에 오랫동안 침묵했던 다수도 중간층이었고, 6월 항쟁으로 변혁을 이끌어 낸 다수도 중간층이었다. 또 마찬가지로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엄혹한 시절을 조용히 지나온 다수도 중간층이었고, 촛불 민심으로 뒤엎은 다수도 중간층이었다.

 

항간에는 이들 중간층이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따르는 보수성향을 띠나,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따르는 진보성향을 띠는 복합성을 가진다고 하는데, 일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4. 태극기 부대 그리고 기독교

 

그런데 앞서 언급한 대로 오늘날 우경화 된 기독교는 태극기 부대의 정체성을 자신의 주체성으로 삼는다. 이들이 담지하는 논리에는 앞에서 다룬 이야기들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

 

사회적으로 학습한 무색 무취의 역사관을 바탕에 두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여 생각한다는 정교 분리의 논리를 들어 스스로를 중립 지대에 서 있는 주체로 포장한다. 물론 이들이 말하는 정교 분리의 원리도 본 의미가 크게 퇴색한 왜곡된 이야기다(애초에 정교 분리는 신앙의 자유를 위한 것이지, 정치사회적 무관심을 뜻하지 않는다).

 

거기다가 내면화 된 분단의식이 덧칠해진다. 색깔론은 교회 안에서도 횡행한다. 상식적이고도 교양 있는 현대인들이 어떻게 교회 안에서 그렇게 세뇌당하고만 있느냐? 아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왜곡된 언론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듯, 우경화 된 성직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만 단독 채널로 청취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합리적 사고를 무화시키는 종교적 권위의 낙차라는 게 참으로 무섭다. 종교적 열심을 원천 삼아 학습까지 하니 어찌 보면 왜곡된 사고방식에서 달아날 방도가 딱히 없다고 봐야 한다.

 

굉장히 피학적인 구조 아래에 놓인 기독교 신자들은 그러면 어디에서 출구를 찾느냐? 다름 아닌 자본의 증식을 긍정해 주는 교회의 메시지를 통해서다. 덕분에 상식적이고도 교양 있는 중간층들도 우경화 된 기독교의 피학적 논리를 견디고 종교적으로 승화하는 희열을 맛본다.

 

보통 가학과 보상의 프로세스가 연이어 반복되면 보상에 의해 가학의 구조와 논리가 가려지고 그 자체가 주체 안에 스며든다(<파블로프의 개> 실험 속 주인공인 개의 주체화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바꿔 말해, 반복적인 프로세스를 제공하는 세력들의 주체가 곧 나의 주체가 되는 주체의 동일화가 일어난다. 때문에 속한 집단의 논리와 가치는 합리적 의심의 과정 없이 그대로 나의 것이 된다.

 

그래서 우경화 된 기독교 신자들의 손에 태극기가 들려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종교적 열심이 클수록 당연하다. 왜냐하면 어찌 됐든지 간에 그게 그들의 결론적인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촛불 민심에 따라 정권 교체도 이뤘고, 사회가 격변하고 있으니 이들도 보는 눈이 있으면 바뀌지 않겠는가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미 우경 세력의 정체성과 동일한 주체성을 확립한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유튜브 채널을 달고 산다.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학습하는 것이다. 일종의 주체성의 자기 강화다.

 

단지 말로만 과거와는 다른 시대라는 걸 피력해서는 소용없다. 그들의 논리 근간을 흔드는 전제들을 해체하는 작업들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테면, 분단 현실의 극복 같은 대전환이 필요하다. 그래야 덮어 놓고 좌와 우를 나누는 색깔의 허상이 깨진다.

 

종교적 열심이 갖는 순수한 에너지를 비하하고 싶지는 않다.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바라기는 대전환의 과정을 거쳐 허상이 깨지고, 그 에너지들이 발전적으로 효용될 수 있으면 한다. 그게 종교의 본래적인 힘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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