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SMALL

십년 지기 지인을 만났다. 신년이기도 하고 얼마 전 장례 일정으로 그를 도운 일이 있어서기도 하다. 그를 만날 땐 마음이 편하다. 시커먼 내 속을 가장 많이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지인 중 하나라 그런가 싶다. 물론 그도 그렇다. 어떤 부분에서 말이 통한다는 뜻일게다. 허나 사람 살이라는 게 그렇듯 모든 게 다 통하지는 않는다. 간혹 서로 부담을 느끼거나 굳은 얼굴을 감추지 못할 때도 있다. 뭐 대개의 경우처럼, 정치관 때문에 그렇고 종교관 때문에 그렇다.

 

물론 굳이 서로 다른 의견을 입밖으로 꺼내 시시비비를 가리지는 않는다. 특히 그를 대할 때 더 그렇다. 가급적 조심한다. 나보다 훨씬 연장자이기도 할 뿐아니라, 앞으로 사는 동안 일상을 나눌 오랜 말벗 하나를 괜한 시비로 잃고 싶지 않아서다. 그래도 간혹 민감한 이슈로 말이 섞일 때가 있다. 되짚어 보니 두어 번 그랬나보다. 그 때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관계를 생각해 살짝 피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

 

가만 보면 그와 같은 이들은 참 부지런하더라. 굳이 청하지 않아도 카톡으로 그들의 논리를 배달한다. 카톡 뿐 아니라 각종 온라인 매체와 오프라인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성실하다. 저널리즘식으로 말하면, <뉴스 재생산>이 끊임없다. 그런 걸 보면, 보수 진영의 컨텐츠 원-저작자들은 뉴스거리를 쏟아내는 데에 재미 좀 나겠다 싶다. 그렇게 열심히 퍼다 날라 주는데 얼마나 재미지겠는가?

 

그런데 이런 압도적인 뉴스 재생산의 현상은 진영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보수 성향이니까 떠드는 데시벨이 높다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보다는 그들이 속한 <담론의 볼륨 크기><구심력>이 크게 좌우한다. 눈덩이를 굴릴 때, 초반엔 지지부진 하다가도 어느 정도 볼륨이 생기면 기하급수적으로 부피가 불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는 <주류 담론><비주류 담론>을 가르는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진영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했으니 예를 들자면, 촛불 민심이 춤추던 탄핵 정국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그 당시 얼마나 비주류였던 진보 담론이 구심력을 발휘했는가?

 

여튼 다시 돌아가서 말을 잇자면, 언제부턴가 나는, 보수 논리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이들 앞에서 굳이 매번 빗겨설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물음 앞에 서곤 했다. 덕분에 필요에 따라서 빗겨서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방어하기도 하고, 내가 공감하는 담론들을 그들 앞에 성실히 재생산하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 십년 지기 지인과 환담 중 떠오른 민감한 화제 앞에 굳이 빗겨서지 않았다. 어찌 보면 주류 담론이 큰 덩치로 집어 삼키는 논리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으르렁 하고 댓거리를 한 건지도 모르겠다. 괜한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고.. 그런데 이렇게 신경이 미세하게 곤두서는 얘기들을 맞부딪치고 돌아오는 날에는 헛헛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이는 상대가 쉽사리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분명 그렇다.

 


"구심력이 강한 담론들은

좀처럼 서로 잘 섞이지 않는다."


 

그래서 다들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말로 설득되지 않는다고.. 그런데 그렇게라도 해서 얻는 바는 분명 있다.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주류 담론의 확장을 적어도 내 앞에서 만큼은 일정 부분 저지하는 전선을 만들 수 있다! 일종의 담론의 국지적인 경계선인 셈이다. 사실 담론이라는 게 눈에 보이는 무엇이 아니라서 손에 잡히지도 않지마는, 격렬하게 떨림이 이는 첨예한 그 경계선들은 도처에 깔려 있다. 가부장의 담론과 페미니즘 담론의 경계선이 연인 사이(부부 사이)에 자리하고, 신자유주의 담론과 저항 담론의 경계선이 학교와 가정 등 일상 곳곳에 자리한다.

 

대신 이렇게 충돌하는 담론들이 도처에서 경계선을 지으면, 서로 섞일 수 없는 무수한 담론의 클러스터(cluster)들이 파생된다. 거기에다 알고리즘으로 무장한 소셜 네트워크까지 가세하니, 클러스터 파생의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경계선도 더욱 두터워진다. 한 동안 항간에 유행처럼 번진 <미시 파시즘>이라는 개념도 이러한 클러스터 단위를 중심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이렇게 각 담론들과 소규모 클러스터들이 도통 섞이질 않고 충돌만 일으키며 뻗대고 있다가도 들불 번지듯 주류 담론이 무너지고 역전 현상이 일어날 때가 있다. 이는 한 쪽의 구심력이 붕괴되고 있거나 다른 쪽의 구심력이 기하급수적으로 폭발할 때 그렇다. 앞서 말한 대로 박근혜 탄핵 정국 때가 그렇다. 또는 각각의 경계선이 <충돌하는 접점>이 아니라 이익을 위해서든 선의를 위해서든 <소통하는 접점>으로 치환될 때 그렇다. 이를 테면, 최근 남--미 관계가 그렇다.

 

하지만 이와 같이 대대적인 담론 역전의 발판이 그저 마련되지는 않는다. 손 놓고 있다가 갑자기 상대 담론의 구심력이 힘을 잃는 법은 없으며, 비주류 담론이 하루 아침에 무한 확장을 하지도 않는다. 또 전날까지 충돌하던 접점이 어느 한순간에 소통 창구로 변하지도 않는다. 담론의 역전을 마련하는 역량은 반드시 시간을 잊은 듯한 부단함 속에 생겨난다. 번쩍이는 섬광 같은 역사적 전복의 순간도 그런 부단함이 쌓인 바탕 위에 펼쳐진다.

 

 

 

며칠 전, 유시민 작가가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다. <유시민의 알릴레오 / 유시민의 고칠레오>라는 컨텐츠인데, 그의 행보 또한 위와 같은 담론 운동의 일환이다. 더 이상 지면 신문과 지상파 방송에 국한되지 않는 다매체 다채널의 시대상을 반영한 결과다. 이는 소셜 네트워크 개국 시기에 <나는 꼼수다>가 시대적인 매체전환기의 타이밍을 노려 잭팟을 터뜨린 상황과는 사뭇 다르다. 이미 다변화 된 매체 생태계에 적응한 보수 담론을 상대로 지난한 싸움을 내다보고 발을 들여 놓는 것과 같다. 세간에는 차기 대권 주자로 유력한 유시민이 대권을 마다하고 유튜버를 자처하는 게 못내 아쉬운 모양인데, 전혀 그렇지 않다. 매일 같이 상대 담론을 모니터링하고 차근 차근 뜯어보며 저항 담론을 생산하는 일은 정당 정치 못지 않게 피곤하고 지난한 일이다.

 

불안한 이야기를 잠시 환기하고 글을 맺어야겠다. <썰전>이나 <알쓸신잡> 그리고 각종 토론회 등 방송 매체를 통해 할 말 다하고, 거기다 책 쓰고 강연까지 다니며 이미 담론 운동에 충실히 기여하고 있는 그가 왜 두 팔 걷어 부치고 유튜버까지 자처했나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일제 치하 민족 반역, 군부 독재, 반민주 세력으로 이어져 온 기득권 주류 담론이 그만큼 발악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는 유시민 방송 챙겨보라는 일차원적인 권면이 아니다.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못내 참고 거르고 피하지 말고, 때로 필요하다 싶을 때는 담론의 최전선에 선 것처럼 스스로를 일으키라는 것이다.

 

그래야 그 날이 온다!




#유시민알릴레오#유시민고칠레오#유시민의알릴레오#유시민의고칠레오#뉴스재생산#담론#담론운동#담론생산#미시파시즘#주류담론#비주류담론#담론전복#담론역전#담론구심력#탄핵정국#남북관계#북미관계#남북미관계#저항담론#대항담론#대안담론#나는꼼수다#나꼼수#썰전#유시민#알쓸신잡#백분토론#100분토론#정치평론#정치평론가#다매체다채널


 

 

반응형
LIST
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