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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마음이 도통 가시지 않을 때, 나는 서점에 간다.

 

먼저 베스트셀러 코너에 가서 요즘은 무슨 책들이 자본의 부양을 받아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나 둘러본다. 여전히 자본의 증식과 자기계발, 인간관계 조언에 해당하는 책들이 대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역시나 별다를 게 없구나하는 생각이 스치면, 자연스럽게 서점 귀퉁이에 있는 철학, 사회학, 문화사 코너로 발길을 돌린다.

 

그러다 정말 속이 꽉 막힌 날엔 만지작거리다 내려놓길 반복하는 책 한 권을 들고 계산대로 간다. “~!” 바코드를 찍어 결제하는 소리와 함께, 알 수 없는 체증이 조금이나마 내려가는 걸 느낀다. 평소 필요한 책은 온라인으로 구매하면서, 이런 날은 꼭 제값을 다 주고 책을 손에 쥐고 돌아온다.

 

흔히 말하는 <시발 비용>이다. 엿같은 기분이 드는 날은 이렇게 한 번씩 가서 지른다.



 

얼마 전에도 그런 일이 있어서 어김없이 책 한 권을 사 들고 왔다. 요즘에는 <갈무리> 출판사의 책들이 좋아서 갈 때마다 <갈무리>에서 출간한 책을 사 온다. 이번에는 라울 바네겜(Raoul Vaneigem)<일상생활의 혁명>을 골랐다. 프랑스 68혁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책인데, 요즘 내 일상이 당시 맥락과 맞닿는 부분이 많아서인지 절로 손이 갔다. 특히 목차에 실린 의미 있는 무의미함”, “불가능한 참여”, “불가능한 커뮤니케이션”, “겉모습의 조직”, 이런 말들이 그냥 확확! 꽂혔다.

 




나는 꼭 책을 읽을 때 저자 소개가 담긴 책날개와 앞뒤 표지를 참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내려가는 습성이 있다. 왜냐면 이 과정을 거치면 나름 책의 내용이 어렴풋이 스캔이 되기 때문이다. 역시나 이번에도 경건한 마음으로 스캔을 하는데, 뒷표지에 담긴 저자 인터뷰 인용문 중 훅~ 가슴에 와서 박힌 문장이 있다.

 


<거인이 크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일어서자!>


 

요즘 애들 말로, “~~ 지렸다!”를 속으로 외쳤다. 항상 옹송그린 마음을 담아 모든 말을 둥글게 전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있는 내게 딱 필요한 말이었다. 말이란 게 진짜 힘이 있다고 생각이 드는 게, 저런 말을 곱씹어 되뇌이면 가슴 아래 뭔가 단단한 힘들이 뻗쳐 오르는 걸 느낀다.



 

그런데 가만 보니 라울 바네겜 본인이 한 말은 아니고, 인용한 말이었다. 뜬금없이 말의 원출처가 궁금해 폭풍검색을 하니 프랑스대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원출처 되는 이는 피에르 베르니오(Pierre Vergniaud)라는 혁명가로, 프랑스대혁명 당시 위의 말과 함께 역사적인 연설을 한 인물이라 한다.

 



그리고 베르니오의 불을 내뿜는 연설을 있게 한 배경에는 <자발적 복종에 관한 고찰>을 남긴 라 보에티(La Boetie)의 사상이 있었다.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라 보에티의 책이 시중에 있다. 가끔 책을 읽다 보면 이렇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유의 향연에 빠질 때가 있는데, 그게 참 재미가 쏠쏠하다. 아마 다음에 고를 책은 라 보에티의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여튼 베르니오가 한 말이든 누가 한 말이든, 지리는 저 말 한 번 더 써 갈기고 자야겠다.


<거인이 크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일어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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