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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살인의 추억> 다시 보기

Scott's manager 2019. 9. 27.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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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화성 연쇄 살인범>DNA 대조로 찾았다는 뉴스가 떴다. 범인으로 추정하는 인물은 현재 교도소에 수감 중인데, 10/1에는 자백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 이에 덩달아 영화 <살인의 추억>도 조명을 받고 있다. 그간 이상하리만치 손이 안 가던 영화였는데, 덕분에 이번에 <살인의 추억>을 봤다.

최근 봉준호 감독이 세계적 거장임을 증명한 <기생충>이라는 역작이 나오기도 했지만, 항간에는 그래도 <살인의 추억>이 손에 꼽는 명작 아니겠냐며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칸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기생충>보다 어떤 면에서 낫다고 평하는지 개인차는 있겠으나, 두 영화를 보고 난 지금은 어렴풋하게나마 그 이유를 가늠할 수 있게 됐다.

단적인 인상만 짧게 이르자면, <기생충>은 시종일관 무겁게 조이는 긴장이 이완되는 구간이 별로 없는 반면, <살인의 추억>은 대중성을 보다 가미한 까닭이겠지만 긴장과 이완의 굴곡을 비교적 잘 안배한 편이라 몰입에서 오는 피로도가 적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긴장과 이완의 측면뿐 아니라 이번에 <살인의 추억>을 보며 새삼 놀란 것은 2003<살인의 추억> 상영 당시 봉준호 감독이 드러내고자 했던 사회적 부조리가 2019년 현재에는 상당 부분 대중적인 문제 인식으로 환기되어 이슈화됐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2019년의 시각에서 볼 때 <살인의 추억>에는 2003년 당시에는 쉽사리 알아채기 힘들었을 페미니즘적 코드들이 작품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더불어 국가폭력에 대한 고발도 한데 그려져 있었다.

그럼 장면들을 하나씩 살펴보자(스포 ).

 

- 페미니즘적 코드가 묻어났던 장면들 -

1. 입체적인 여성 형사 캐릭터

영화 속 강력계엔 남성 형사들의 커피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잡무에 시달리는 여성 형사가 등장한다. 물론 연출을 위한 시대상의 반영이겠지만, 고정된 성 역할을 따라 영화 전반부에 등장한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단서를 직접 캐치 하고 생존한 여성 피해자를 인터뷰하는 등 반전된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이와 같은 캐릭터의 입체성은 여성의 성 역할이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2. 여고생 몸에 밴드 붙이는 장면

사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의아했던 장면이다. 물론 영화 말미의 내용과 긴밀히 연결하는 장치로 쓰임새가 있다는 걸 영화를 다 보고 알게 됐지만, 그래도 김상경이 별일 아니라는 듯 여고생 등을 까고 맨살에 밴드를 붙이는 장면은, 미투니 페미니즘이니 관련 이슈가 한창인 지금 와서 보면 사실 신경 쓰이는 장면이긴 하다. 이 또한 마찬가지로 가부장적 남성 시각이 지배적이었던 80년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연출로 보인다.

3. 여고 화장실 조사 장면

학생의 말대로 여고 화장실에 범인이 은신해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기 시작한 김상경은 학교를 방문한 김에 화장실로 가서 살펴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것은, 왜 김상경은 여성 화장실을 불쑥 찾아가 개인적으로 조사를 진행했는가 하는 점이다. 뒤이은 전개를 통해 확인하면, 학교 측과 사전 협의가 이루어진 상황은 아니었다. 공무를 빌미로 사적 공간을 그것도 여성 전용 화장실을 김상경이 들락거리며 조사를 진행한 건 그가 얼마나 성인지 감수성이 무딜 수밖에 없는 당시 가부장 사회의 표본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데 이와 대비하여 재미있는 것은, 김상경이 화장실에서 마주친 양호선생님의 캐릭터다. 여성이지만 여성 같지 않은 이미지, 짧은 숏커트 머리에 중성적인 목소리, 거친 멘트. 여러 가지 면에서 일반적으로 여성 하면 떠올리는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난 이미지들을 한껏 보여주었다. 앞서 전형적인 가부장적 남성 이미지로 분해 묘사된 김상경과는 극을 이루는 캐릭터인 셈이다.

4. 여성 피해자 방문 조사

양호선생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학교 근처 여성의 집을 찾아간 김상경. 그러나 그 집에 사는 여성은 김상경을 극도로 경계하는데... 앞선 장면들에서 여성 화장실을 아무렇지 않게 들락거리던 김상경이 행동을 멈추고 여성이 혼자 사는 집임을 알아채는 장면은, 김상경의 캐릭터가 앞서 보인 가부장적 남성 이미지에서 다소 변화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여성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해 여성 형사를 대동해 인터뷰를 하는 대목도 마찬가지로 캐릭터 변화의 하나로 볼 수 있다.

5. 송강호와 전미선의 대화 구도

영화에서 송강호와 전미선은 부부로 나온다. 그런데 이들의 대화를 가만히 살펴보면 딱 베이비부머 세대인 우리 부모님 세대의 대화다. 그만큼 무신경한 남자의 캐릭터와 그에 순응적인 여성의 캐릭터가 고스란히 그 안에 녹아 있다는 얘기다. 영화의 주를 이루는 장면도 아닌 데다가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장면이라 알아채기가 쉽지 않지만, 해당 세대 부부의 모습을 잘 표현한 대목들이다. 그런데 이와 대비해 재미있는 장면은, 영화 막바지에 송강호가 시간이 흘러 2003년 현재의 시간 속에 가족들과 아침 식사를 하는 풍경이다. , 우유, 주스 등 간편식으로 가족들이 끼니를 때우는 동안 전미선은 거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다. 80년대에서 2000년대로 시대가 바뀌는 동안, 부부 사이의 관계, 가족 구성원 내 관계에서 전미선의 입지 변화가 상징적으로 보이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6. 영화 ‘인트로’와 ‘엔딩’에 등장하는 아동들

<살인의 추억>은 영화 인트로엔딩이 같은 장소다. 바로 사건 현장이기도 했던 농수로. 영화 시작과 함께 한 소년이 메뚜기를 잡으며 바로 그 농수로가 나타나는데, 공교롭게도 엔딩 장면도 그 농수로다. 그런데 엔딩에서는 소년이 아니라 소녀. 인트로의 소년과 엔딩의 소녀가 대조적으로 등장하는데, 재밌는 것은 인트로의 소년은 당시 사건 현장에서 송강호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하기만 할 뿐 아무 도움도 안 됐지만, 엔딩 속 소녀는 최근 다녀갔다는 범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까지 한다.

7. 백광호의 얼굴 흉터

페미니즘적 코드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남성 지배적인 가부장 사회의 상흔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바로 동네 백치로 등장하는 백광호의 얼굴 흉터다. 영화 말미에서 결정적 목격자로 확인된 백광호가 송강호와 김상경과 마주한 장면에서 순간 백광호는 얼굴 흉터가 생긴 이유를 밝히는데, 그 이유가 가히 충격적이다. “나 어렸을 때, 아궁이에 집어넣었다. 저 사람이...” 백광호가 가리킨 사람은 다름 아닌, 아들 백광호를 찾아 달려오는 아버지. 사연의 줄거리는 생략되어 있지만, 어린아이를 아궁이에 집어넣을 정도로 가학적인 아버지였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 국가폭력에 대한 고발을 그린 장면들 -

1. 경찰 심문 과정에서의 폭력

경찰 심문 과정에서 빚어지는 폭력은 비단 <살인의 추억>뿐 아니라 여러 영화에서 묘사됐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동네 백치 백광호, 여자 빤쓰 입은 조병순, 박해일이 연기한 박현규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모두 폭력이 행사됐다. 특별히 박현규 심문 과정에서 벌어진 폭행에서는 반장(송재호)이 폭력을 행사한 김뢰하를 향해 때리지 말라캤지!”하며 발길질을 하는 대목이 뒤이어 나오는데, 일종의 즉각적 응징이라 할 수 있다. 영화 말미에 이르면 김뢰하가 파상풍으로 폭력을 행사하던 자신의 오른쪽 다리를 잃는 것으로 나오는데, 공무를 빙자한 폭력, 국가폭력에 대한 최종적인 응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게 아닌가 생각한다.

2. 피의자 조작

백광호와 조병순은 범인이 아님에도 피의자로 지목당한다. 강압적인 심문을 통한 자백으로 수사를 종결지으려는 경찰들의 속내는 좀처럼 진전이 없는 연쇄 살인사건의 종지부를 찍음과 동시에 계속해서 추락하는 공권력을 적당한 선에서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박현규(박해일)가 심문받는 장면에서 죄 없는 사람들 잡아다 족치는 거 동네 애들도 다 알어!”라고 내뱉는 말로써 피의자 조작도 서슴지 않던 당시 시대 상황을 직접적으로 고발했다.

3. 시위 무력 진압

짤막하게 지나가는 장면 중에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던 시절이라는 걸 알리는 거리 현수막, 그리고 뒤이어 김뢰하가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머리채를 잡고 발길질을 서슴지 않는 해당 장면은 군사정권 당시의 엄혹했던 시절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덧붙이는 글] - 밝혀져서 속 시원한가? 글쎄...

최근 DNA 대조로 화성 연쇄 살인범을 찾았다는 뉴스가 나오면서 엄청난 반색도 있었지만, 이내 당시 수사의 허점들이 속속 드러나 담당자들이 난색을 표하는 모양이다. 게다가 사건 현장 인근 일대가 신도시 개발로 보상처리 되면서 범인으로 지목된 이의 가족도 보상금으로 100억 부자가 됐다는 이야기가 뉴스로 나오기까지 했다. 글쎄... 미궁 속에 감춰진 것들이 밝혀지기만 하면 뭔가 속 시원할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 뭐랄까, ‘인생만사 새옹지마같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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