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Columns

미디어 금식, 할 거면 제대로 하자

Scott's manager 2019. 1. 25. 06:56
반응형
SMALL

[부제] 매체철학적 관점에서 본 교회 속 편향된 미디어 담론


2016년 사순절에 "미디어 금식" 관련해서 <뉴스앤조이>에 기고했던 글이다. 매년마다 돌아오는 사순절(고난주간)마다 미디어 금식을 하는 교회들이 있다. 아마 올해도 마찬가지일거다(참고로 2019년 사순절은 3월 6일 재의 수요일을 기준으로 시작이다). 미디어 금식이란 게, 미디어 자체를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편향되게 바라보는 관점에서 출발한 거라 "과연 미디어가 그렇게 악한가?"라는 물음에서 써내려 간 글이다(물론 대학원 전공이었던 매체철학의 관점에서 고찰했기도 했다). 2016년에는 설 연휴 즈음해서 사순절이었나보다. 어쨌든 미디어 금식, 뭔가 좀 부담되고 불편하고 부당하다 느끼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한다.  






설 연휴를 지나고 보니 사순절이다. 명절 음식으로 배를 가득 채운 덕분에 누군가 억지로 사순절 특별 금식을 시킨다 해도 부담되지 않을 타이밍이다. 금식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한국교회 안에서 일련의 신앙적 실천으로 사순절(대체로 고난주간)을 기해 미디어 금식을 해 온 것도 아마 10여 년 정도 되지 않았을까 한다. 올해도 어쩌면 일찍부터 사순절을 기해 미디어 금식 캠페인을 벌인 교회는 벌써부터 금식 기간에 돌입했을 터이고, 고난주간을 기해 캠페인을 벌이고자 하는 교회는 지금쯤 관련 프로그램을 뒤적이고 있을 것이다.



 


- 세분화된 미디어 금식 영역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우리를 둘러싼 미디어 강산을 둘러보면 한 번만이 아니라 마치 두세 번은 바뀐 느낌이다. 통화와 메시지 송수신이 주 기능이었던 피처 폰이 들려 있던 손에는, 이제 무선인터넷 웹 서핑, 게임과 같이 PC에서 가능했던 여러 기능이 집약된 스마트 폰이 쥐어져 있다. 그리고 페이스북이니 인스타그램이니 하는 소셜 미디어를 통한 네트워킹은 우리를 엮어 사방팔방 둘러쳐져 있다. 앞으로 사물 인터넷(Internet of Things)이 구현하게 될 '모든 것이 연결된 세상, 모두가 연결된 인간'의 모습은 이미 어렴풋이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10여 년 전에 비해 금식 대상이 되는 미디어 종류도 세분화되었다. TV, 인터넷, 게임 등의 미디어 이용 자제를 내세우던 과거의 캠페인이 이제 TV,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인스타그램, 유튜브, 모바일 웹 서핑 등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다시 말해 미디어 디바이스 개체 수로 따진다면 과거 TV와 컴퓨터로 국한되었던 디바이스에 스마트 폰 하나 더 얹어진 것이나 실제 이용을 자제하면서 단절감을 체감하는 세부 영역들은 훨씬 다양해졌다.

 

미디어 금식 캠페인과 더불어 호소하는 목소리는 우리더러 그 단절감을 기회로 반전시키라 한다. 교회의 근간을 이루며 신앙의 중심을 차지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도록 촉구한다. 이와 같은 목소리를 내는 주체들의 진의는 분명 두터운 먼지 아래 가려진 신앙의 본질을 긍정적으로 건드리고 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과 관련하여 성과 속을 의식적으로 구별하려 애쓰는 사순절과 고난주간의 행태와 그 관성은 미디어 자체의 성과 속을 구별 짓는 데까지 나아간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각 미디어별로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누가 구별 짓느냐는 것이다. 각 교단 총회가 기준을 정하고, 미디어별로 구별을 지어 기준의 통일성을 유지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개교회별로 상이한 기준을 적용해 교회마다 속된 미디어로 정죄하는 미디어 종류가 널뛰기하듯이 천차만별인 것도 아니다. 신기하게도 누가 지침을 내린 것처럼 대체로 어슷비슷하다. 예상하겠지만 교회가 정한 기준에 따라 하나하나 따진 것이라 보기 힘들다. 일상생활에서 공유하고 있는 미디어 관련 담론을 그대로 빌려 온 케이스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렇게 차용한 현재의 미디어 관련 담론은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다.

 


- 전자 미디어를 보는 부정적 시선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미디어 관련 담론은 대체로 전자 미디어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다. TV, 컴퓨터, 스마트 폰 모두 부정적인 시선의 대상이다. 과거에 비해 일상생활 전반에서 이 미디어들을 활용하고 있지만 일정 간격을 두고 선택적 이용을 해야 하는 것들로 늘 인식하고 있다. 특히 전자 미디어 중독 담론은 이와 같은 인식을 공고히 하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전자 미디어라서 중독을 일으킨다는 식의 논리는 면밀히 되짚어 봐야 한다. 일례로 시도 때도 없는 스마트 폰의 과용이 오프라인 인간관계 단절을 야기한다는 논리를 스마트 폰 자체가 부정적이고 속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비약해서는 안 된다. 스마트 폰 발명 이전에도 미디어 몰입 현상은 있었다. 단순히 스마트 폰이나 전자 미디어와 관계없이 미디어 몰입이 있었다는 뜻이다. 가장 쉬운 예로, 조간신문을 저마다 펼쳐 들고서 뉴스 탐독에 여념이 없던 과거 통근 열차를 들 수 있다.

 

이는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오늘날은 다르다는 식으로 대충 넘길 수 없는 한 단면을 시사한다. 단적으로 한 번 반문해 보자. 왜 잠자리 들기 전에 스마트 폰을 하는 것은 침실의 인간관계를 해치는 것이고, 반대로 책장을 넘기며 독서를 하는 것은 교양 있는 행위란 말인가? 이는 분명히 '편향된 미디어 담론'이다.

 

어쩌면 책은 미디어가 아니라고 반론을 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디어 역사에서 책은 논란의 여지없이 미디어에 속한다. 미디어학자들은 책을 구성하는 글, 다시 말해 문자 자체도 미디어로 분류한다. '미디어'(media)라는 개념을 전자 디바이스에 국한하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서 매개하는 성질을 지닌 모든 것들로 정의한 연유다.

 

그렇다면 앞선 이야기의 논리를 마찬가지로 독서를 하는 행위도 반감을 사던 시절이 있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대답은 "그렇다"이다. 쉽게 생각해 보자. 모두가 까막눈이었고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하게 살아서 남의 논밭 매던 시절, 툇마루에 앉아 글자 익힌다고 책 펴 들고 종아리 긁적이는 모습은 잘한다고 칭찬받던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문자라는 미디어를 익히고 책을 가까이 한다고 해서 당장 살림살이가 나아질 수 있는 사회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자라는 미디어가 발명되고 서적이 심심치 않게 간행되었어도 부족한 것 없이 살던 사람들의 문화였지 모든 사람들의 문화는 아니었다. 도리어 대다수 사람들이 노출된 문화는 문자 문화보다는 구술 문화에 가까웠다.

 

따지고 보면 그 이후의 삶의 방식에서 독서가 교양 있는 행위로 대접받은 것도 사회구조 자체가 구술 문화에서 문자 문화로 상당 부분 이행한 뒤의 일이다. 돌려 말할 것 없이, 문자 익히고 책 보는 걸 즐겨 어려운 문헌도 술술 읽고 쓸 줄 아는 레벨이 되면, 등 따숩고 배부르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는 사회구조가 됐다는 말이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소위 잘 나간다는 일류대-전문직 코스는 영락없는 문자 문화에 개인 길들이기 아니었던가? 독서나 공부라 일렀던 모든 것들이 이를 위한 테크닉이었던 것이다.

 

 

- 금식 캠페인 실천 항목들, 되짚어 봐야

 

오늘날 전자 미디어는 부정적이고 속된 미디어로 구별되는 한편 문자 문화에 기반한 독서, 공부, 지면 뉴스 탐독 등과 같은 행위가 생산적인 활동으로 각인된 것은 이와 같은 행위의 누적이 여전히 문자 문화에 깊이 경도된 사회가 제공하는 부와 권력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앙의 본질을 다시금 매만지고자 실천에 옮긴다던 미디어 금식 캠페인의 세부 실천 항목들을 되짚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사순절이라서, 혹은 고난주간이라서 크게 마음을 먹고 미디어 금식에 돌입했다고 하자. 그런데 TV, 컴퓨터, 게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스토리는 일시 정지에 들어갔으면서 각자의 부와 권력을 부여잡기 위해 해 오던 문자 문화 테크닉에는 여전히 골몰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단 한순간도 묵상할 수 없다면 이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앞서 밝히기도 했지만 분명 '미디어 금식 캠페인'을 부르짖는 주체들은, 잊고 있던 신앙의 본질을 환기하기 위한 긍정적인 목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실천에 옮기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르짖는 주체들의 목소리를 듣는 청자 중에는 미디어 금식 캠페인의 주요한 의도보다는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편향된 미디어 담론을 반복·재생산하는 데 그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최근 카카오톡을 통해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교회 공동체 내외로 퍼뜨리는 바람에 개신교가 카톡교로 명명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는데, 미디어 금식 캠페인 담론 생산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사순절이 시작됐다. 절기 의미를 살려 벌써부터 미디어 금식을 시행한 교회도 있을 것이고, 다가오는 고난주간을 기해 실행에 옮기려는 교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캠페인을 이끌며 부르짖는 주체들이나, 이를 듣고 실행에 옮기는 청자들이나 모두 한번쯤은 그들 자신의 입을 빌어 재생산되는 것들의 의미를 되짚어 면밀히 다룰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할 때 미디어 금식을 하는 각 사람들 마음에 공허함이나 각박함 대신에 주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반응형
LIST
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