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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노동운동포럼>에서 다뤘던 내용 중 하나가 <사회진보연대> 사이트에 올라왔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아티클이라, 링크를 아래와 같이 담아둔다.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focus&nid=7904&page=1

 

사회진보연대 :: 사회주의자여, 포퓰리스트를 경계하라

21세기 사회주의 주장은 대부분 자본을 악마화하고 노동자계급을 숭고한 영웅으로 내세우는 타락한 노동자주의에 가깝다. ‘혼란스러운 사회주의관’으로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 어떤 경우라도 포퓰리즘으로 퇴행해서는 안 된다.

www.pssp.org

 

그리고 관심 있게 읽었던 구절들을 꺼내, 공감되는 부분과 의문점들을 달아본다.

21세기 사회주의 주장은 대부분 "자본을 악마화하고 노동자계급을 숭고한 영웅으로 내세우는" "타락한 노동자주의"에 가깝다. 한지원 연구원은 ‘혼란스러운 사회주의관’으로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며, “어떤 경우라도 포퓰리즘으로 퇴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계급을 숭고한 영웅으로 내세우는...노동자주의>라는 말 앞에서 멈칫했다. 한 마디로 대항 담론이 그 자체로 성역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다. 그리고 잇따라 던지는 작금의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단상.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이 공정하더라도 “결과가 부정의”한 것이 자본주의!>

자본주의에서 누구나 자신의 노동을 상품화하여 판매할 수 있지만(평등), 자본 소유자는 굳이 자신의 노동을 판매할 필요가 없고, 임노동 계약이 법적으로 보장되더라도(공정) 상품화된 임노동은 자본 소유자에 의해 통제되며, 노동계약에 따라 임금이 지불되더라도, 결국 소유자 계급이 잉여를 지배한다.

<평등><공정>이 노동의 과정 곳곳에 배어 있지만, 빈틈을 여지없이 파고드는 불균형과 통제 그리고 부당함을 이겨내기가 도무지 쉽지 않다고 언급하고 있다. 노동권 방어를 위한 바리케이드를 전면에 세워두었으나, 측면과 후면을 치고 흔드는 형국이라 방어가 잘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뒤이어 <자본가>만 쳐 내면 뭔가 될 것이라 여기는 건 금물이라는 논지를 펴기 위해 소련의 사례를 가져오는데,

사회주의의 지향에 따라 자본가 없는 경제를 조직하고자 했던 소련의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 소련의 시도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국유화 계획경제로 요약된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기존 지배계급의 반혁명을 저지하기 위한 방안이었지만, 이는 결국 당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로 이어졌다. 또한 경제 영역에서 계급으로서 자본가는 사라졌을지라도 국유화된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 당이 자본가의 역할을 대신했다. 무엇보다 소련의 ‘국가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고유한 모순으로서 이윤율의 하락을 막을 수 없었고, 미국의 법인기업 자본주의보다 훨씬 앞서 붕괴했다. 소련의 실패는 당의 독재, 그리고 국유화가 아닌, 사회주의를 향한 다른 경로를 고민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즉 계급으로서의 자본가는 사라졌지만, ‘(국가)이 자본가 역할을 대신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자본가가 본질적으로 시스템에서 사라지지 않았음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스탈린이라는 독재자 개인 혹은 당의 과오만이 원인이 아니라, 자본가의 역할이 소거되지 못했던 국가 시스템도 원인이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노동운동의 풍경들, 곧 자본가를 밀어내기만 하면 뭔가 될 거 같은 노동자주의를 우려스럽게 바라본다.

국내 일각의 좌파들은 실패한 소련을 반복한다. 이들은 정치 권력을 장악한 소련 사회주의의 시도가 왜 당의 독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진지하게 반성하지 않는다. 자신들이라면 소련과는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국유화 계획경제를 주장한다. 국유화된 계획경제를 통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충분히 생산하고, 적절하게 분배할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당-국유화 노선을 반복하는 구(舊)사회주의로는 현대적 자본주의를 제대로 비판할 수 없다. 자본주의를 비판할 능력을 상실한 사회주의는 노동자주의로 타락한다. 자본가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은 항상 도덕적으로 옳다는 것이 노동자주의 도그마다.

다소 마주하기 불편한 논조일 수 있으나, 대안이 빈약한 노동자주의 도그마만으로는 위험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은 분명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다.

노동자주의는 사회주의로의 여정을 오히려 퇴보시킬 뿐이다. 노동자주의는 노동자들의 이기적 행동을 정당화한다. 노동자 다수가 사회와 기술에 관한 지식을 쌓으려 할 필요 없이 자본가에게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인식을 확산한다. 노동자들은 항상 도덕적으로 우월하므로, 대안적인 사회윤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간주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의 이기주의적 운동은 오히려 노동자가 대안이 될 수 없음을 만천하에 드러내게 된다.

자본주의 비판과 더불어 소외당한 주체였던 노동자를 건져 올리는 것이 애초의 목적이긴 하지만, 노동자 주체를 절대 주체로 상향시켜 모든 것들의 환원 지점으로 삼는 것은 분명 위험한 일이다. 일종의 환원주의에 대한 경계인데, 모든 대안을 노동자의 주체 찾기로 소급하는 환원주의는 대안으로서 빈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생명력은 현실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힘에 있다. 사회, 경제의 객관적인 구조를 분석하지 않고, 사회적 불만을 그저 수렴하고자 한다면 참혹한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게 목표가 되어야지, 불만을 접수하는 게 목표가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근본적인 대안이라는 게 어디 찾기 쉬운 일인가? 불만 접수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짚은 것은 동의하나, 근본적인 대안과 그에 따른 시나리오가 얼마만큼 갖추어졌는가는 사실 의문이다.

그래서일까? 강연을 맡은 이도 대안을 그리는 청사진으로 아직은 마땅하게 손에 쥔 게 없노라고 고백한다.

지금 당장 자본주의가 아닌 경제 질서가 어떤 형태일지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사회주의자들이 고민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어떻게 상품화폐 경제와 그것의 불평등한 결과를 지양할 것인가. 어떻게 계급 없는 경제질서를 조직할 것인가. 어떻게 임금노동의 모순을 극복할 것인가. 이런 질문에 당장 명확한 대답을 제시할 수 없더라도, 자본주의가 제기하는 질문 자체를 회피하는 ‘사이비 사회주의’는 대안이 될 수 없다. 포퓰리즘에 휩쓸리지 않고 자본주의 비판의 과학으로서 사회주의를 재건하는 것, 이것이 21세기 사회주의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다.

다만 어떠한 군더더기를 걷어내야 할지, 어디에 포커스를 맞춰 나가야 할지를 명확히 했다. 역사가 말하는 과오가 이미 있는데 그 전철을 되풀이 할 필요가 있겠냐는 것이다.


일단 아티클은 여기까지인데, 속이 조금 쓰리다.

지난 투쟁의 역사가 짧지 않고, 그사이 역사 속으로 스러져 간 인물들 또한 적지 않은데, 여전히 버젓이 자본의 횡포가 날로 더하는 형국이다 보니 맞닥뜨린 국면이 아닌가 싶다. 자본주의라는 빌런은 자꾸만 진화해 화력을 더하는데, 불나방처럼 돌진하는 손들에 쥔 짱돌은 그다지 화력의 발전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속이 쓰리다.

혹시 먼 미래엔 좀 다를까?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할 텐데, 머릿속 이상과 현실에서 눈으로 보는 것 사이에 괴리가 크니 장담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좀 낫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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