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매체철학적 관점에서 본 교회 속 편향된 미디어 담론 2016년 사순절에 "미디어 금식" 관련해서 에 기고했던 글이다. 매년마다 돌아오는 사순절(고난주간)마다 미디어 금식을 하는 교회들이 있다. 아마 올해도 마찬가지일거다(참고로 2019년 사순절은 3월 6일 재의 수요일을 기준으로 시작이다). 미디어 금식이란 게, 미디어 자체를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편향되게 바라보는 관점에서 출발한 거라 "과연 미디어가 그렇게 악한가?"라는 물음에서 써내려 간 글이다(물론 대학원 전공이었던 매체철학의 관점에서 고찰했기도 했다). 2016년에는 설 연휴 즈음해서 사순절이었나보다. 어쨌든 미디어 금식, 뭔가 좀 부담되고 불편하고 부당하다 느끼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한다. 설 연휴를 지나고 보니 사순절이..
이전 교회에서부터 연락하고 지내는 교우가 한 분 계시다. 교회와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안고 있는 그가 하루는 이렇게 물었다. 남성 중심으로 쓰여진 성경과 설교에 거북함을 느껴 교회에 나오길 거부하고 있다는 대학생, 고등학생 딸을 둔 지인이 있단다. 상황이 이러한데 과연 기독교계는 관련 이슈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나? 게토화 된 기성교회 안에 있으면서 숱하게 고민하던 것들이라 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여 응답해 드렸다. 아래의 글은 그 내용이다. 1. 오해가 없도록 좀 더 보태면, 성경은 남성 필자들이 쓴 책입니다. 물론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쓴 책입니다. 그러나 당시 성경을 쓴 필자의 삶을 둘러싼 사회문화적인 맥락들이 완벽하게 소거되어 기록된 건 아닙니다. 성경이 남성 필자들에 의해 쓰이면서..
"저는 우리나라를 저주합니다..!" 컨베이어 벨트에서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한故김용균 님의 어머니께서사건 이후 내뱉은 말씀이다. 모처럼 칼바람이 불던 어제 저녁,광화문 세월호 광장. 불꽃을 당기고 떠난 아들을 기억하며어머니가 광장에 섰다. "아들이 떠난 지 35일, 그래도 아직 용균이가 살아 있는 것만 같아서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보고 카톡도 보내 봅니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용균이한테 너무 미안한 게 왜 이런 세상에 너를 낳고 키워서 이렇게 힘들게 살게 했는지..그렇게 키워서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 노예로 살으라고 너를 키운 건 아닌데 너무 미안하다.." 아들이 떠난 지 한 달 여,어머니는 그렇게 거리의 투사가 되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존중받고더불어 살아보자는 말이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들..
갑작스럽게 장례 집례를 부탁 받았다.그야말로 갑작스레.. 낯선 이의 마지막 몸.그 앞에 까무러치는 고인의 어머니. 이미 마음에서 끊어낸 지 오래인 듯한 고인의 아들. 그리고 그 옆에 더 낯선 풍경으로 서 있는 나. 그렇게 달리 살아온 넷이 한 곳에 있었다. 가족이지만한 곳에서 부대껴 살지 않았던 셋,객으로 함께 선 나. 한바탕 곡이 지나고신의 이름을 부르고서야알았다. 비록 서로 낯설게 살았을지라도그의 마지막 기운이서로 한 날에 만나게 했음을.. 까무라쳐 들려 간 노모와모든 말을 표정에서 지운 아들의뒤를 따라 그 곳에서 나서며속으로 한 마디 건넸다. "서로 낯설게 살다 한 날에 만나는구료" "잘 가시오.."
양승태 장로를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구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황교안 전도사의 정치 활동을 쌍수 들어 환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땅을 디디고 사는 한반도. 백년 안짝에 불과한 시간임에도 가려진 눈으로 보는 역사는 이토록 다르다. 피 묻은 손과 아첨하는 혀로 얼마나 목숨을 상하게 했으며, 평화를 깨부수었는지 알수 없도록 날조된 역사.. 생명과 평화의 가치가 깃든 성경을 도무지 가르치지 않는 교회는 신앙이 아니라 색깔론을 힘주어 가르친다. 아프다. 하나님은 생명을 구하고 평안을 주려고 아들까지 내주었는데, 도리어 주의 이름으로 악을 선인 양 바꾼다. 3.1운동 그리고 임시정부 100주년의 해다. 100년.. 때로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는 말이 밉다. 허나 제 아무리 굳게 창을 닫아 건들 ..
십년 지기 지인을 만났다. 신년이기도 하고 얼마 전 장례 일정으로 그를 도운 일이 있어서기도 하다. 그를 만날 땐 마음이 편하다. 시커먼 내 속을 가장 많이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지인 중 하나라 그런가 싶다. 물론 그도 그렇다. 어떤 부분에서 말이 통한다는 뜻일게다. 허나 사람 살이라는 게 그렇듯 모든 게 다 통하지는 않는다. 간혹 서로 부담을 느끼거나 굳은 얼굴을 감추지 못할 때도 있다. 뭐 대개의 경우처럼, 정치관 때문에 그렇고 종교관 때문에 그렇다. 물론 굳이 서로 다른 의견을 입밖으로 꺼내 시시비비를 가리지는 않는다. 특히 그를 대할 때 더 그렇다. 가급적 조심한다. 나보다 훨씬 연장자이기도 할 뿐아니라, 앞으로 사는 동안 일상을 나눌 오랜 말벗 하나를 괜한 시비로 잃고 싶지 않아서다. 그래도..
과 앞에서,어떤 근본적인 의심을 가졌을 때의 ‘어색함’과 ‘서투름’.. 그것은 경험의 심한 동요나 역사 감각의 단절이 존재하는, 문자 그대로 이다. 또한 그것은 확실하고 유용하다고 여겨지던 그 수많은 것들로부터 우리들을 벗어나도록 만든다..우리들이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개념이 갑자기 개념이라기보다 문제로, 그것도 단순한 분석적인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역사적인 운동의 문제로 여겨지게 될 때, 그것들의 흔하디 흔한 설명이나 반복되는 충돌음을 듣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것들의 형태가 주조되어온 본질을 찾아내는 것밖에 없다. - Raymond Willams(1977), Raymond Willams가 의 개념을 되짚으며 일갈한 내용이다. 허..